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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예는 후고구려(後高句麗 마진 태봉)를 건국한 왕(재위 901~918)으로 성은 김씨, 신라 제47대 헌안왕(憲安王) 또는 제48대 경문왕(景文王)의 아들(861년 출생 경문왕 1년, 추정)이라고도 한다. 아마도 정권다툼에서 회생되어 지방으로 몰려난 것으로 여겨진다. 

876년(헌강왕 2년) 세달사(世達寺:興敎寺)의 승려(僧號는 善宗)가 되었다. 

891년(진성여왕 5년) 처음에는 죽주(竹州:영동)의 산적 기훤(箕萱)의 부하로 있다가 

892년(진성여왕 6년) 북원(北原) 양길(梁吉)의 부하가 되었다. 10월 양길(梁吉) 의 부하 1백여 명의 기병을 이끌고 북원(北原) 동부락과 명주(溟州) 관내를 습격하였으며, 강원· 경기· 황해 일대를 공략하여 많은 군사를 모으는데 성공하자, 군도(群盜)를 배경으로 세력기반을 굳혔다. 

894년(진성여왕 8년) 10월 백여 명의 무리로 아슬라(지금의 강릉)를 취했으며 스스로 장군이라 칭 하였다. (사졸들과 함께 즐거움과 괴로움을 같이하고, 직책을 주고 빼앗음에도 공(公)으로 하고 사(私)로 하지 않았다. 이로써 여러 사람의 마음이 그를 두려워하고 사랑하며 떠받들어 장군으로 삼게 만들었다) 

895년(진성여왕 9년) 왕륭, 왕건(王建) 가족이 투항해 왔으며(896년?), 8월에는 신라의 저족(猪足), 성천의 두군을 취하고 철원 (鐵圓) 등 10여 군현을 빼앗았으며, 내외관직을 설치하였다. 

898년(효공왕 2년) 7월에 신라의 패서도(浿西道 지금의 평양 이남)와 한산주 (漢山州) 관내에 있는 30여 성을 쳐서 빼앗고, 송악(松岳郡 지금의 개성)을 도읍으로 정하였다. 

899년(효공왕 3년) 7월에 북원의 양길은 북원(원주)·중원·국원(충주) 등, 10여 성의 성주와 더불어 비뇌성(非惱城)으로 침범해 왔으나 오히려 패하여 도망갔다. 

900년(효공왕 4년) 왕건(王建)으로 하여금 광주(廣州)·충주(忠州) 등을 공취하게 했으며, 그 공으로 왕건(王建)에게 아찬(阿粲)의 직위를 내렸다. 중원 괴양의 청길과 신훤이 투항해 왔다. 

901년(효공왕 5년) 후고구려를 건국하여 스스로 왕이라 칭하였다. 

904년(효공왕 8년) 국호를 마진(摩震)으로 개칭, 연호를 무태(武泰)로 하고 내외 관제를 정비하였다. 

905년(효공왕 9년) 도읍을 철원(鐵圓)으로 옮기고 연호를 성책(聖冊)이라 함. 신라의 패강도 (浿江道) 등 10여 주현이 항복해 왔다. 8월에 군사를 움직여 신라의 변두리를 쳐서 빼앗고 죽령 동북까지 이르렀다. 

910년(효공왕 14년) 견훤이 신라의 나주성(羅州城)을 포위하고 싸우자 수군을 파견하여 견훤을 내 쫓았다. 

911년(효공왕 15년)에 국호를 태봉(泰封)으로 개칭하면서 연호도 수덕만세 (水德萬歲)로 고쳤다. 발해왕 대인선, 궁예에게 사신을 보내옴. 승려 석총이 궁예를 비판하자 궁예가 쇠몽둥이로  때려죽임. 

913년(신덕왕 2년) 왕건(王建)을 시중(侍中)으로 삼았으나 곧 시중 벼슬을 떼고 다시 수군을 통솔하게 함. 

914년(신덕왕 3년) 왕건을 불러 역모죄를 추궁하였으나 한림랑 최응이 왕건을 구해주었다. 

연호를 정개(政開)라 개칭하였다. 국사를 총리하는 광평성 (廣評省)을 비롯하여 병부(兵部) 등 10부와 9관 등의 관제를 정비하여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또한 강원·경기·황해의 대부분과 평안·충청 일부를 점령하고, 왕건(王建)과 제휴하여 진도(珍島)·나주(羅州)를 점령하여 남서해의 해상권도 장악하였다. 

그러나 궁예는 신라를 멸도(滅都)라 일컫게 하고, 투항한 신라인을 모조리 죽이는 등 전제군주로서의 횡포가 심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지위를 합리화하기 위하여 자신은 미륵불(彌勒佛), 두 아들은 보살(菩薩: 靑光菩薩· 神光菩薩) 이라고 칭하는 등, 백성을 괴롭히고 많은 신하를 희생시키며 호탕방일한 생활을 하였다. 

915년(신덕왕 4년) 부인 강씨와 두 아들 죽임. 

918년(경명왕 2년) 6월 폭군으로 전락한 궁예는, 결국 그의 부하인 신숭겸 (申崇謙) ·홍유 (洪儒) ·복지겸(卜智謙)·배현경(裵玄慶) 등이 왕건(王建)을 추대하자 도망가다 평강(平康)에서 백성에게 피살되었다. 
 
왕건 즉위 이후, 반란 사건은 네차례 이상이나 기록돼 있다. 

왕건의 즉위 5일만에 환선길이 모반을 꾀하다 실패하고 참수됐다. 소판 종간, 내군장군 은부를 처형하였다. 

환선길은 그 아우 향식과 함께 왕을 추대한 공이 있어 왕건이 심복으로써 위임하여 왕궁을 숙위케 하였었다.

그의 아내가 ‘당신의 능력이 남보다 뛰어나 사졸이 복종하고 큰 공이 있는데 정권은 다른 람에게 있으니 부끄럽지 않냐’고 하자 선길이 마음 속으로 그 말을 옳게 여겨 틈을 엿보아 변란을 일으키려고 하니, 복지겸이 이를 알고 비밀히 왕건에게 아뢰었다. 왕건은 형적이 드러나지 않아 그 말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느 날 왕건이 전전상에 앉아서 학사 두서너 사람과 국정을 의논하고 있는데 선길이 50명의 병사를 이끌고 내정으로 쳐들어왔다. 왕건이 ‘짐이 비록 너희들의 힘으로써 왕이 되었지만 어찌 천명이 아니랴. 천명이 이미 정해졌는데 네가 감히 그럴 수 있느냐’고 호통을 쳤다.

선길이 왕의 말과 얼굴빛이 평시와 같이 침착해 보이자 복병이 있는가 의심하여 달아났는데 숙위하던 군사가 쫓아가서 그를 죽였다. 향식은 뒤에 오다가 일이 실패한 것을 알고 도망가다가 역시 군사가 추격하여 죽였다.

14일째 되는 날에는 이흔암이 반란을 꾀하다 주위의 신고로 체포되어 극형에 처해졌고 이어 동년 9월과 10월에는 청주인에 의한 모반사건이 연이었다. 

마군 대장군 이흔암이 반역을 도모하다가 처단. 그는 궁예 말년에 웅주를 쳐 빼앗았으므로 그대로 그 곳을 지키게 하였는데 왕건이 즉위한 소식을 듣고 몰래 해치려는 마음을 품고 부르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떠나오니 사졸들이 많이 도망해 버렸으므로 웅주가 다시 후백제의 소유가 되어버림.

이흔암의 이웃에 사는 수의형대령 염장이 태조에게 고변. 왕건이“흔암이 제 마음대로 와서 변경의 땅을 잃었으니 죄는 실로 용서하기 어려우나 나와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고(왕건과과 대등한 지위?) 왕을 섬겨 그전부터 정분이 있으니 차마 죽일 수 없으며, 또 반역의 형적이 드러나지 않았으니 저도 변명할 말이 있을 것이”

라 하자, 염장이 흔암을 엿보기를 청해 왕건이 은밀히 내인을 보내 감시하던 중, 흔암의 처 환씨가 변소에서 ‘남편의 일이 성취되지 못하면 나는 화를 받을 것이다’라고 중얼거린 것이 발각되어 드디어 하옥됨.

왕건이 꾸짖기를 “법이란 것은 천하의 공정한 것이므로 사정으로써 법을 굽힐 수 없다”하니 흔암은 눈물만 흘릴 뿐이었다. 저자에서 목베게 하고 집을 적몰하였으나 그 도당들에게는 죄를 캐묻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명주(강릉)의 실력자 왕순식 역시 왕건에게 복종하기를 계속 거부했다. 이 와중에 8월에는 공주·운주 등 10여개 주·현이 자발적으로 후백제에 투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