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조 왕건(王建)은 본관은 개성(開城)이며 자는 약천(若天)으로 시호는
신성 (神聖)으로 금성태수(金城太守) 융(隆)의 아들로 어머니는 위숙왕후(威肅王后:
追尊) 한씨(韓氏)이다. (877년 출생).
895년(진성여왕 9년) 아버지를 따라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가 898년(효공왕 2년) 정기대감(精騎大監)이 되고, 900년(효공왕 4년) 광주(廣州)·충주(忠州) 등을 공취, 그 공으로 아찬(阿粲)의 위계를 받았다. 903년(효공왕 7년)에는 수군을 이끌고 전라도 지방을 공략, 궁예의 영토를 확장하여 알찬(閼粲)에 승진되고 계속하여 전라도·경상도 지방에서 견훤 (甄萱)의 군사를 격파하는 한편 정벌한 지방의 구휼(救恤)에도 힘써 백성의 신망을 얻었으며, 913년(신덕왕 2년) 태봉(泰封)국 시중(侍中)이 되었다. 918년(태조 1년, 경명왕 2년) 6월 세력이 강대해짐에 따라 난폭한 행동을 자행하는 궁예가 민심을 잃자 홍유(洪儒)·배현경(裵玄慶) 등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어 즉위, 국호를 '고려' 라 하고 연호를 천수(天授)라 정하였다. 919년(태조 2년, 경명왕 3년) 서울을 송악(松嶽)으로 옮기고 융화정책· 북진정책· 숭불정책을 건국 이념으로 삼아 정책을 펴나갔다. 즉, 지방 호족들을 회유·무마하는 한편, 서경(西京)을 개척하고 여진을 공략했으며 불교를 호국신앙으로 삼아 각처에 절을 세웠다. 920년(태조 3년, 경명왕 4년) 신라와 수교하였다. 10월에 후백제 왕 견훤(甄萱) 이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신라의 대야성(大耶城)을 쳐서 함락하고, 진례성 (進禮城)으로 진격하였다. 신라 왕이 원조를 요청하니, 부장을 보내어 신라를 구원하자 견훤이 이를 듣고 퇴각하였다. 921년(태조 4년, 경명왕 5년) 2월 흑수말갈의 추장 고자라 170명을 데리고 고려에 귀화하였으며, 12월에는 왕자 무(武)를 세워 정윤(태자)으로 삼음. 922년(태조 5년, 경명왕 6년) 7월 명주 장군 김순식이 아들을 보내 고려에 항복. 925년(경애왕 2년) 10월 왕건, 유금필을
파견하여 백제의 연산진(문의)을 침, 11월 후백제 왕 견훤(甄萱)이 그의 조카
진호(眞虎)를 볼모로 보내어 왔다.
935년(태조 18년) 투항해 온 신라 경순왕을 맞아 평화적으로 합병하고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음. 936년(태조 19년) 앞서 항복해 온 견훤과 함께 신검(神儉)의 후백제를 공격,
이를 멸망시켜 마침내 후삼국(後三國)을 통일하였다. 이 해 [정계(政誡)] [계백요서(誡百寮書)]를
저술하여 정치의 귀감으로 삼게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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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훈요십조
(訓要十條)】
943년 고려 태조가 그의 자손들에게 귀감으로 남긴
10가지의 유훈(遺訓)으로 신서 10조(信書十條)·십훈(十訓)이라고도 한다.
① 국가의 대업이 제불(諸佛)의 호위와 지덕(地德)에
힘입었으니 불교를 잘 위할 것.
《훈요 10조》는 태조의 사상 배경과 정책의 요체(要諦)가
집약된 것으로, 왕권강화를 위한 견해가 천명되었고, 불교숭상과 풍수지리설의
혹신(惑信)을 통해 집권을 정당화하고 후사(後嗣)에 의한 계속적인 집권을 확고하게
하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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