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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秦 기원전 221~206) 효공, 백리해(白里奚), 

중국 역사상 최초의 통일국가. 

주(周)나라 제후의 하나로 목공(穆公)시대에는 춘추5패 중 하나였으며 전국시대에도 전국7웅으로 강성하였다. 

초기에는 주왕실 서쪽 변두리에 살던 유목 씨족이었으리라 여겨지고 있는데 기원전 771년경 주 평왕(平王)으로부터 기산(岐山) 서쪽의 땅을 하사받아 제후가 되었으며, 그 후 점차 세력을 확장하였다. 

춘추시대에는 목공시대를 제외하고는 뚜렷한 세력을 확보하지는 못하였으나 전국시대에 이르러 기원전 4세기경 효공(孝公)이 상앙(商앙)을 채용하여 내정 개혁을 단행하고 위수분지의 중앙지인 함양(咸陽)에 도읍하였으며, 중앙집권적 전제군주체제를 확립한 후에는 그 세력이 급속히 증대하여 마침내는 중원에 대한 침략전을 개시하게 되었다. 

그 후 혜문왕(惠文王) 때부터는 스스로 왕이라 칭하고 파(巴) 촉(蜀)에 그 세력을 뻗쳐 사천(泗川) 분지를 점유하였으며, 서쪽의 대국으로서 나머지 6개국과 맞서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진(秦)과 나머지 6개국 사이에는 소진, 장의 등의 종횡가(從橫家)라고 일컬어지는 책사(策士)들이 활약하였으며 합종(合從) 연횡(連橫) 등의 외교술이 나타나게 되었다. 

그 후 소양왕(昭襄王)에 이르러 이웃 여러 나라를 평정하고 기원전 256년에는 명맥만을 유지하던 주 왕실을 멸망시켰으며, 드디어 기원전 221년 진왕 정(政) 이 중국의 통일을 이루었다. 진왕 정(政)은 통일을 이룩한 뒤 스스로 시황제(始皇帝)라 일컬었다. 

시황제(始皇帝)에 의한 중국통일은 중국 최초의 통일이며 또한 봉건제를 폐지 하고 최초로 군현제(郡縣制)를 전국에 실시하여 관료제에 의한 중앙집권적 전제군주체제를 형성하였으며 이 제도는 그 후 중국 국가 지배체제의 근간으로 확립되었다. 

또한 나라마다 달랐던 화폐, 도량형, 문자의 서체를 통일하고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해 무기를 몰수했다. 

대외적으로는 북쪽 흉노족의 침입에 대비하기 위해 만리장성(萬里長城)을 쌓고 장군 몽념(蒙恬)으로 하여금 토벌하게 했다. 

그러나 분서갱유(焚書坑儒)로 많은 유학자들로부터 비판을 받았으며, 만리장성 이나 아방궁(阿房宮), 능묘(陵墓) 건설 등으로 인해 백성의 원성을 사게 되어 각지의 민중반란이 일어나 겨우 15년만에 그 제국은 와해되어 버렸다. 

그러나 진(秦)제국은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그것은 처음으로 중국에 통일국가를 완성했다는 점이다. 현재 차이나(China)라는 영어 이름도 진(Chin)에서 기원한 것이다. 
 

 
한(前漢 기원전 202~서기 8년) 

한민족 최초의 통일국가 진(秦)의 뒤를 이어 건국된 한민족 두번째 통일국가. 

진승, 오광의 난을 필두로 진나라에 대항하여 일어난 수많은 저항 가운데 가장 두각을 나타낸 것은 항우와 유방으로, 마침내 초한전(楚漢戰) 끝에 BC 202년에 한나라(漢)의 고조(高祖) 유방은 숙적 항우를 해하(垓下)에서 격파하고 장안 (長安)에 도읍을 정하여 통일된 한(漢)제국을 건설하였다. (한신, 범증

한이란 명칭은 유방이 황제가 되기 전 한중(漢中)의 왕에 임명되어 한왕이라 한 데서 유래된 것이다. 

진(秦)이 엄중한 법치주의를 채용하여 실패했던 것을 감안해, 법제를 늦추고 부분적으로 봉건제를 부활해 군현제와 병용하는 이른바 군국제(郡國制)을 실시했다. 

한나라(漢) 시대에는 유교를 정치체제의 표본으로 삼았고, 종이와 지진계를 발명하는 등 여러 가지 과학적인 진보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무제(武帝)를 정점으로 하여 점차 쇠퇴하기 시작하여 서기 8년 외척 왕망(王莽) 한의 건국 후 13대 210년만에 제위를 빼앗기고 말았다. 왕망은 신(新 8~23)왕조를 건설했지만 그의 급진적인 개혁정책이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23년 반란군에게 피살됨으로서 신왕조도 단명을 기록하며 멸망했다. 

왕망(王莽)에게 빼앗긴 한나라(漢)를 부흥하려는 하남(河南)의 호족(豪族)들 에게 추대된 종실 유수(劉秀 - 光武帝)는, 기원 25년에 전국을 평정하고, 도읍 을 낙양(洛陽)에 정했다. 보통 이 때 생성된 한(漢)을 후한(後漢 25~220) 또는 동한(東漢)이라고 하고, 한고조에 의해 건국된 한나라(漢)를 전한(前漢) 또는 서한(西漢) 라고 부른다. 

후한 말년 환관(宦官)이 득세하고 정치가 부패하여 184년 황건(黃巾)의 난이 일어나고 위(魏), 촉(蜀), 오(吳)로 천하가 삼분된, 220년 조조(曹操)의 아들 조비(曹丕)가 헌제(獻帝)를 폐위시키고 제위에 오르면서 완전 멸망했다. 
 

 
흉노(匈奴) 

기원전 3세기경부터 기원후 1세기 말까지 몽고 고원과 만리장성 지대를 중심으로 활약한 유목기마민족. 

흉노족은 터어키계, 몽고계, 아리아계 등의 설이 있으나 터어키계의 설이 유력하다. 진(秦)의 통일국가 형성 무렵, 흉노의 연제족의 두만(頭曼)선우가 몽고 고원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였다. 

그러나 이후 그의 아들 묵특이 자기 부친을 죽이고 스스로 선우가 되었다. 묵특은 남만주의 동호(東胡), 북방의 정령(丁令), 예니세이강 상류의 키르키즈를 정복하고 서쪽의 월지(越氏)를 격파하여 북아시아 최초의 유목국가를 세웠으며 이어서 산서성 북부에 침입하였다. 

이에 한 고조 유방이 직접 출진하여 싸웠으나 백등산(白登山)에서 묵특에 포위되어 구사일생으로 탈출한 후, 한나라 왕실의 딸을 선우의 아내로 보내고 매년 많은 견직물, 술, 쌀 등을 보낼 것을 조건으로 화의(和儀)를 맺었다. (기원전 198년). 

그 후로도 흉노는 중앙아시아 쪽으로 세력을 떨쳐, 그 결과 흉노의 지배권이 동은 열하(熱河)로부터 서쪽으로는 동터어키, 북쪽은 예니세이강, 그리고 남쪽으로는 오르도스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나 한무제(漢武帝 기원전 141~87)에 이르러 흉노에 대한 적극적인 공격에 의해서 흉노는 점차 그 세력이 위축되었으며 또한 이 틈을 타 정령, 선비(鮮卑) 족 등이 독립하여 나갔다. 뿐만 아니라 흉노에서도 내분이 일어 서흉노(질지 선우)와 동흉노(호안아선우)가 대립하였다. (기원전 54년) 그 뒤 호한아는 항복하였고, 질지는 키르키즈 고원으로 쫓겨났다가 한의 군대에게 살해되었다.(기원전 36년) 

그 후 흉노는 호한아를 중심으로 부흥하였으며, 한나라와의 관계도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재차 내분이 일어 남흉노와 북흉노로 분열하였다. 남흉노는 감숙, 산서, 섬서 지방에 나뉘어 살면서 점차 중국화되어 갔고 북흉노는 때때로 중국에 침략하기도 하였으나 선비(鮮卑)의 공격을 받고 선우가 살해되었으며, 후한과 남흉노의 연합군이 그 본거지로 쳐들어감으로써 대패하였고 이로써 몽고 고원에서의 흉노국가는 사라지고 말았다. 
 
삼국시대(三國時代 220~280) 

조조의 위(魏), 유비(劉備)의 촉(蜀), 손권(孫權)의 오(吳)나라가 대립하는 삼국시대가 시작된다. 이 시기에는 유명한 제갈공명(諸葛孔明)의 출사표 (出師表)가 등장하는 때이기도 하다. 

진(서진 西晋 265~316) 

263년 위에 의해 촉이 멸망하고 280년 진(晋)의 사마염(司馬炎)에 의해 오가 멸망하면서 삼국시대가 끝이 나고 진나라(晋)가 천하를 통일하게 된다. 그러나 제권(帝權)을 강화하기 위해, 일족의 왕들에게 병력을 가지게 한 일은 이민족의 침입을 부른 결과가 되었다. 

316년에 진나라(晋)는 흉노(匈奴)에게 망하게 되지만(5호16국 316~439), 진나라의 일족으로 강남을 다스리고 있던 사마예(司馬睿)는 호족(豪族)의 지지를 받아 진왕조(晋王朝)를 재건했다. 전자를 서진(西晋 265~316)이라 하고 후자를 동진(東晋)이라 한다. 서진은 4명의 황제에 의해 52년간 지속됐고, 동진은 송(宋)의 유유(劉裕)에게 멸망되기까지 11명의 황제에 의해 104년간 지속됐다. 왕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