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배기유머 > 고사성어 > 한국 > 후삼국시대 궁예, 왕건, 견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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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6년 - 평주(평산)의 대호족 박지윤 가문 궁예에 귀부. 
- 왕륭, 왕건 부자 궁예에 귀부. 

- 궁예, 왕륭을 金城태수로 삼고 왕건을 송악(개성) 성주로 삼음. 

- 궁예, 僧嶺, 臨江을 점령. 궁예, 스스로 왕을 칭하며 내외관직을 설치. 

897년  5
- 왕륭 사망.
6
- 진성여왕, 효공왕 요에게 선위.
12
- 진성여왕 사망.
898년  2
- 궁예, 송악성을 수리하고, 천도. 
3
- 왕건을 정기대감으로 삼아 양주와 견주를 치게 함.
7
- 道詵 죽음. 

- 후고구려 궁예, 浿西道 및 한강주내 30여 성을 취하고 송악부에 본거를 옮김. 紅巖(김포군 양주), 金浦 (김포), 穴口(강화) 등 30여성을 점령. 

11
- 궁예, 팔관회를 행함. 죽은 병사들에 대한 조의.
899년  7 - 북원의 양길, 국원(충주) 등 10여 성주를 시켜 궁예를 공격하다가 非惱城에서 대패. 
11
- 최치원, 면직되어 해인사로 은둔.
900년 10 - 궁예, 왕건을 보내어 광주(경기), 충주, 청주, 당성(경기 남양), 괴양(충북 괴산) 등의 지역을 평정. (경기 남부와 충북 지역 장악) 이러한 공이 인정되어 왕건을 아찬으로 삼음. 

이후 이 지역에서 궁예(왕건)의 세력권에 편입된 인물로는 진천의 임명필(왕건 즉위 후 순군부령), 임희(병부령)과 청주출신의 김언규 (백서성경), 근겸, 관준, 능달 등이고, 광주의 왕규, 충주의 유긍달 은 왕건과 혼인관계 를 맺음. 

(왕건이 정벌한 지역의 호족들이 왕건의 세력으로 편입된 예이다. 물론 이때는 궁예의 부하였다.) 

- 견훤, 완산(전주)에 도읍하고 “백제(후백제)”라는 국가를 건설함.

901년 8 - 견훤, 금성(나주)군 남쪽의 10여개 주현 공략. 

- 견훤, 대야성을 공격하였으나 패배. 견훤은 신라의 목을 죄기 위해서 낙동강 동안에 이르는  최단 거리인 합천 루트를 이용하고자 했다. 

- 궁예, 왕을 칭하고 국호를 “후고구려”라 일컬음, 
- 궁예, 영주 부석사(浮石寺)의 신라왕 화상을 칼로 침.

902년  3 - 신라, 대아찬 효종을 시중으로 삼음.
903년  3 - 왕건, 錦城(현 나주) 등 10여성을 공격 점령함. 금성의 명칭을 나주로 고치고 군대를 나누어 지키게 하고 귀환. 나주는 전남의 심장부이자 경제적 요충지로 당의 선진문물을 접근키 용이하였다. 더구나 유학생, 선승들이 들어오는 길목으로서 왕건은 실제로 당에서 귀국하는 선승들과 교류했고 그 가운데 형미는 왕건이 철원으로 회군할 때 함께 돌아오기도 했다. 영산강 하구에 위치한 나주 회진은 중국 대륙으로 가는 중요한 항구였던 것이다. 

- 왕건, 安邊拓境之策을 개진. 궁예, 치하하며 閼粲(알찬)으로 임명. 

- 양주(良州 -경남양산) 장수 김인훈이 급히 구원을 요청하매 궁예가 왕건에게 명하여 구하게 함. 

- 궁예, 국도를 옮기려고 철원, 부양 등지에 가서  산수를 周覽.

904년 - 궁예, 백관을 설치. 국호를 후 고구려에서 마진으로, 연호를 무태라 함. 

- 패서도 10여 주현이 왕건에게 투항함. 

7
- 공주장군 홍기, 궁예에게 귀부하면서 궁예의 세력권이 금강 유역까지 미치게 되었다.
905년  2
- 신라에 별이 비오듯 떨어짐. 
7
- 궁예, 국도를 철원으로 옮김. 연호를 성책으로 고침.
8
- 궁예, 청주인 一千戶를 철원으로 이주시킴. 

- 궁예의 마진, 신라의 변경 읍락 침탈. 신라 왕은 이를 막아내기 역부족이라며 성주들은 나가 싸우지 말고 성벽을 지키라고 명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