짜배기유머 > 고사성어 > 한국 > 후삼국시대 궁예, 왕건, 견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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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0년  1
- 신라, 처음으로 고려에 사신을 보내 교빙.
2
- 康州 장군 윤응, 고려에 귀부. 

- 고려 북방 오랑캐에게 자주 침략을 당해서 유금필에게 명하여 북계의 골암진(골巖鎭)에 축성. 

9
- 견훤, 아찬 공달을 고려에 보내 孔雀扇, 竹箭을 선물. 이것은 신라 침공을 앞두고 고려를 무마하기 위한 목적으로 생각되어 진다.
10
- 후백제 견훤, 기병 1만명을 이끌고 대야성(합천), 구사성(초계- 창원)를 공취하고 신라의 진례군(김해 서북방)에 출진. 이에 신라는 아찬 김률을 보내 처음으로 고려에 원병 요청. 그 소식을 듣고 견훤이 물러감. 

견훤은 35세 나에도 함락시키지 못했고 초로인 50세 때에도 공격했다 실패했던 대야성을 노인이 되어서야 쟁취한 것이니 감회가 컸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이후로 고려와 틈이 생겼다는 것은 그간 호의를 보여왔던 왕건에게 자신의 공격의도를 보인 것이며 또한 이제까지의 단순한 국지전이 아닌 앞으로의 전면전 양상으로 바뀌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921년  2 - 흑수말갈의 추장 고자라, 170명을 데리고 고려에 귀화.
10
- 왕건, 서경 행차.
12
- 왕건, 왕자 武를 세워 정윤(태자)으로 삼음.
922년  4 - 고려, 개경 대궐 서북쪽에 일월사 창건.
6
- 하지현(경북 안동지방) 장군 원봉, 고려에 내부.
7
- 견훤, 휘암을 사신으로 삼아 쓰시마에 파견.
11
- 명주 장군 김순식이 아들을 보내 고려에 항복. 
- 진보성주 홍술이 사절을 파견하여 고려에 항복하기를 청함.
923년  4 - 고려 유금필, 북번을 초유(招諭).  귀부한 자가 1천 5백명이고, 사로 잡혀간 우리 나라 사람 3천명이 돌아왔다. 
6
- 고려 윤질이 후량에서 五百羅漢畵像을 가져와 해주 숭산사 안치
924년  1 - 신라, 사신을 후당에 보내 조공.
7
- 견훤, 아들 수미강과 양검을 보내 경상도 북부 지역으로 출병. 견훤은 오랜 침묵을 깨고 경상도 북부 지역으로 출병을 단행, 아들 수미강과 둘째 아들 양검으로 하여금 대야성(합천)과 문소성(경북 의성) 등 두 성의 군대를 동원하여 조물성을 공격하였다. 

여기서 수미강은 견훤의 총애를 받던 금강으로 생각 되어진다. 이에 왕건이 장군 애선과 왕충을 보내 이를 구원하게 했으나 고려 장군 애선이 전사. 조물군 사람이 굳게 성을 지켜 수미강 등이 이기지 못하고 돌아감.

8
- 거란 아보기, 발해 침공.
9
- 견훤, 왕건에게 절영도의 옥색말 한 필을 선물. 
- 신라, 경명왕 죽음, 아우 경애왕 즉위. 
- 왕건, 신라에 사신을 보내 弔祭. 
- 신라, 왕건에게 사신을 보내 방문.
925년  9 - 매조성(買曹城) 장군 능현(能玄), 고려에 내부.
10
- 발해 장군 신덕 등 500인, 고려에 내투. 

- 왕건(고려), 정서대장군 유금필을 파견하여 백제의 영향권에 있던 연산진(문의-청주)을 쳐 장군 길환을 죽이고, 任存郡 (임존성-예산) 을 공략해 3천여 명을 죽이고 사로잡음. 

- 왕건이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조물군에 와서 견훤과 교전. 유금필이 군사를 이끌고 와 응원. 견훤과 인질 교환. 이 때에 견훤의 군사가 날래어 승부를 결단할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에 왕건은 일시적으로 화친하여 견훤의 군사들이 피로하기를 기다리려고 글을 보내서 화친할 것을 요구하고 종제 왕신을 인질로 보내니 견훤도 역시 진호를 보내서 교환했다. (삼국유사) 

이때 고려는 신라와의 화친을 깨고 신라와 동맹을 맺은 댓가를 톡톡히 치루었다. 이 조물성 전투에서 왕건은 크게 불리하여 견훤에게 화해를 청하여 우선 견훤을 尙父라고 칭하여 존대하고 자신의 조카인 왕신을 인질로 보냈다. 

이때 왕건이 견훤을 군영에 불러들여 일을 의논하려고 하니 유금필이 사람의 마음은 알기 어려우니 어찌 가벼이 적과 서로 가까이 하겠냐고 간해 왕건이 그만 두었다.

11
- 신라, 경애왕이 이 소식을 듣고 고려에 사신을 파견해 ‘견훤은 화친할 사람이 못된다’고 함.
12
- 탐라가 고려에 토산물 공납. 

- 견훤(후백제), 거창 등 20여성 공취. 화친으로 북군(고려군)을 묶어둔 견훤은 남군(백제군)군대를 이끌고 거창 등 20여개 성을 일거에 점령했다. 기세를 올린 견훤은 즉각 후당에 사신을 파견, 후당에서는 그에게 검교태위 겸 시중판백제군사면 도통지휘 병마판치등사 백제왕이라 하고 식읍 2,500호를 주었다 (삼국유사) 

- 발해 좌수위 소장 모두간 등이 백성 1천호와 함께 귀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