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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8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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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건, 견훤에게 답서를 보냄.
- 명주 장군 김순식이 조현하러 옴. (고려가 위기에 빠진 상황이었기 때문) 왕건이 왕씨의 성을 내려주고 대광을 임명. 아들 장명에게는 염이란 이름을 내려주고 원보를 임명. 小將 관경에게도 역시 왕씨 성을 내려주고 대승을 임명. - 후백제의 남군이 강주를 공략하자 북군의 원윤 김사과 정조 직량 등이 구원하러 병력을 이끌고 출동하였으나 후백제 남군의 성주 흥종이 초팔성(초계)을 통과하는 북군을 급습하여 고려의 김상을 전사시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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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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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대상 염상과 능강을 보내 안북부에 성을 쌓고 원윤 박권으로 진두를 삼아 개정 군사 700명을 거느리고 이를 지키게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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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건, 탕정군(온양)에 감.
- 운주의 옥산에 성을 쌓고 지키는 군사를 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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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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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훤, 강주를 기습. 강주 원보 珍景(진경) 등이 고자군(경남 고성) 에 양곡을 운반하여 강주가 빈 사이에 견훤이 강주를 기습하였다. 진경 등이 급히 돌아와 싸웠으나 패배하고 300명 전사. 장군 유문은 후백제에 귀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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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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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건, 몸소 삼년산성(충북 보은)을 공격하였으나 패배해 청주로 도망했다.
이에 견훤이 장수를 보내 청주를 침공하였다.
이때 유금필이 명을 받들고 탕정군에 성을 쌓고 있었는데 꿈에 한 대인이 말하기를, “내일 서원에서 변란이 있을 것이니 빨리 가라” 고 하였다. 금필이 놀라 깨어 바로 청주로 달려가 후백제 장수와 싸워서 이를 패배시키고 추격하여 득기진에 이르러 죽이고, 사로잡은 것이 300여명이었다. (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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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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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건, 충주로 물러감. 그 때 견훤이 관흔을 시켜 양산에 성을 쌓았기
때문에 왕건은 명지성(포천) 원보 왕충을 시켜 군사를 거느리고 양산을 쳐서
패주케 함. 관흔은 퇴각하여 대야성을 확보하고 군사를 풀어 대목운의 벼를
베었다. 또 그 다음에는 오어곡에 군사를 나누어 주둔하니 죽령 길이 막히었다.
이에 왕건이 왕충등에게 명령하여 조물성의 형세를 정찰케 함.
* 이때 견훤의 남군이 유독 대목군 등의 벼를 베었던 것은 벽진군의 장군인 이총언이 양식을 비축하여 고립된 성에서 잘 버텼기 때문으로 전투에 임하지 않는 데에 대한 보복이자 고사책이었다. 이후로 남군은 계속 북상하여 오어곡에 주둔함으로써 죽령의 길을 막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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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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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훤이 부곡성을 함락시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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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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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훤, 대야성 확보.
- 신라의 승려 홍경이 후당에서 대장경을 가지고 고려로 옮. - 후백제, 고려의 烏於谷城(오어곡성-군위)을 공격해 고려군 1천명을 죽임. 장군 陽志, 明式 등 6인이 탈출하여 항복. 왕건이 그 소식을 듣고 군사들을 구정에 모아 놓고 6명의 처자들을 그 앞에서 조리를 돌리고 저자에서 사형시킴. - 이 해에 고려 태조 북계에 순행하여 진국성을 옮겨서 쌓고, 통덕진 이라 고침. 원윤 충인으로 진두를 삼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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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9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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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백제의 상선이 일본 쓰시마에 표착.
- 후백제가 나주를 점령하였다. 나주는 바닷길로 통하는 길이었고 왕건의 처향(妻鄕)이기도 하였던 만큼 고려측에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로서 후백제는 서해의 재해권까지 지배해나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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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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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대상 염상을 보내 안정진에 성을 쌓고, 원윤 언수고로서 이를 지키게 하며, 또 영청현에 축성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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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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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태조, 서경에 행차하여 주진을 순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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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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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시마 수가 후백제의 표류민을 송환해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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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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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天竺國 삼장법사 마후라(摩후羅), 고려에 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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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건, 기주(경북 풍기)로 가서 각주 진들을 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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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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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훤, 갑사 5천명을 이끌고 의성부 침공. 고려 장수 홍술 전사. 이에
태조는 나의 좌우의 손을 잃었다고 개탄하였다.
* 후백제가 의성부를 점령하게 되면 고려와 신라의 연결통로가 봉쇄되는 동시에 고려의 영향권인 문경, 예천, 안동, 영주 일원이 그 남부의 요지인 의성부로부터 지원을 받지 못하게 된다. 그럼에 따라 이들 지역은 상호간에 횡적인 연결은 가능하지만 종적인 연결이 불가능하여 각개격파되기 십상이었다. - 견훤이 순주(안동시 풍산면)을 치니 장군 원봉이 도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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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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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건, 剛州(경북영주)로 감. 왕식렴을 보내 안수진에 성을 쌓고 원윤
흔평으로 진두를 삼고, 또 흥덕진에 성을 쌓고 원윤 아차성으로 진두를 잡음.
- 견훤이 장차 고사갈이성을 치려하니, 성주 흥달이 이를 듣고 나가 싸우려고 할제, 목욕하다가 갑자기 오른팔 위에 滅자가 있음을 보았는데, 그 후 10일만에 병들어 죽음. * 그 곳을 함락시켰는지는 기록에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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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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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훤, 신라의 가은현(문경군 가은면)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함. 비록
이기지는 못하였으나 그 위세가 가히 압도적이었다. 남군은 절대 우세를 자랑하면서
북군을 연파해 왔고 이때까지 후백제 영역은 북쪽으로는 충청남도 당진에서
충북 청주, 보은, 충주로 이어지는 선이었다.
그리고 소백산맥 이남으로는 합천을 위시해 대구, 칠곡 그리고 의성을 지배하에 두었고, 그 밖에 낙동강 서안의 진주를 비롯 경남지역을 석권하였다. 이와 더불어 대외 교섭의 걸림돌이었던 나주를 장악하여 이로써 후백제는 호남지역을 완전히 석권하게 된 것이다. - 견훤, 고창군(현 안동) 포위. 김선평, 권행, 장길 등 고창 제지 세력이 결사항전으로 성을 지켰다. 왕건이 예안진에 이르러 여러 장수와 의논하기를 “싸우다 이기지 못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하니, 대상 공선과 홍유가 아뢰기를 “마땅히 샛길로 갈 것이요, 죽령으로 갈 수는 없다”고 함. 유금필은 “죽을 마음만 가지고 살려는 계책이 없어야 최후의 승리를 얻을 수 있는 것인데 먼저 패배할 것을 염려함은 무슨 까닭인가. 만약 급히 구원하지 않으면 고창군 3천여명을 그냥 적에게 주는 것이니 급히 공격하기를 원한다”고 해 왕건이 그 말을 따랐다. 이에 유금필이 저수봉으로 부터 힘껏 싸워서 크게 이겼다. (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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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0년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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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載巖城(경북 진보) 장군 선필, 고려에 귀부.
- 안동 병산전투. 태조 왕건이 견훤과 더불어 古昌郡(고창군-안동) 병산 아래에서 싸워 크게 이겼으며, 죽이고 잡은 성과가 매우 많았다. 견훤은 고창군(안동부)을 치려고 군사를 크게 일으켜 석산에 영채를 마련하니 왕건은 백보 가량을 격해서 고을 북쪽 병산에 영채를 마련했다. 여러 번 싸웠으나 견훤이 패하여 사랑 감악이 사로 잡혔다. * 현지 전설에 견훤 (진훤-지렁이 설화)이 전세가 불리해지면 지렁이로 변해 모래 속으로 기어들어가 고려군은 속수무책이었다.. 이에 고려의 삼태사는 전략을 세워 물 속에 소금을 수없이 풀어 견훤은 배겨낼 수 없어 패주했다는 것이다. * 전투가 계속 될 무렵 이곳 호족인 성주 김선평과 권행 그리고 장길, 이 세 호족이 향군을 이끌고 북군을 지원했다. 현지 민심의 향배에 직접 영향을 미칠 뿐 아니라 지세에도 밝은 이들이 북군에게 협조했다는 것이다. 권행은 과거 견훤이 경애왕을 시해했다는 이유로 고려에 귀순하여 치욕을 씻으려 한 것이라 한다. 그럼에 따라 견훤의 남군은 지극히 불리한 국면에 놓이게 되었고 저녁 무렵에 남군은 붕괴되어 남군의 전사자만 8천 명에 달할 정도로 심대한 타격을 입었다 한다. 오대산 상원사 동종은 북군이 승리한 사실을 청아한 소리로 알렸다 한다. - 병산 전투 다음 날에 견훤이 고창군에 장수를 보내 순주를 공격 함락하고 민가를 약탈해 갔다고 고하자, 왕건이 순주로 가서 그 성을 수리하고 장군 원봉에게 책벌을 줌. * 순주성 습격은 견훤의 상주 지역(아버지의 배신)에 대한 보복감을 엿볼 수 있다. 이에 비해 왕건의 경우는 첨해하게 입장을 달리한다. 친히 군사를 이끌고 나가 상주 지역을 지킨 것이다. *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는 930년 고창전투에서 패전한 견훤이 퇴각하면서 오히려 북쪽에 있는 순주를 공격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납득하기가 어렵다. 그러나 사실의 여부는 모른다. - 永安(영천), 河谷(하양), 直明(안동), 松生(청송) 등 30여 군현이 차례로 왕건에게 항복. * 이후 견훤의 후백제는 고려에 급격히 전세가 불리하게 바뀌어 간 것으로 보이는데 이것은 견훤 정권 내의 정치적 혼란에 기인한 것이었다. 즉 견훤왕의 후계를 둘러싼 내분이 이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그러한 이후로 호족들은 왕건에게 흡수되어 갔고 신라 정부는 새로운 질서에 순응할 수 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순왕은 고려의 고창 전투 승리에 대한 축하를 보내오고 신라와 고려는 본격적으로 서로 교류를 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 이 때에 신라의 동쪽 연해 溟州(강릉)에서 흥례부(안동)에 이르기까지 110여성이 고려에 항복. - 북미질부성(경북 홍해) 성주 훤달이 남미질부성 성주와 함께 고려에 항복.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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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永安(영천), 河谷(하양), 등 30여 군현이 차례로 왕건에게 항복.
- 왕건, 사신을 신라에 보내어 승리를 알림. -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편지를 보내 서로 만나기를 청함. - 신라의 동쪽 연해 110여성이 고려에 항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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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지변(울산)에서 최환을 보내어 고려에 항복하기를 청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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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미질부성과 남미질부성 성주가 함께 고려에 항복.
- 우릉도(울릉도)에서 사신을 보내 지방의 산물을 바침. - 고려 태조, 서경에 행차하여 처음으로 학교를 창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