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26년 4 | - 갑자기 고려에 인질로 간 견훤의 外甥 진호가 병사하였다. 이에 발끈한 견훤이 고려의 인질 왕신을 죽이고 웅진으로 진군하자, 왕건이 여러 성들에게 명령하여 성을 고수하고 나와 싸우지 못하게 하였다. 그 결과 웅주, 운주 등 충남 일대 10여개 주현과 충북 일대가 후백제의 영향권에 들어가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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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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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경애왕이 고려에 사신을 보내 견훤을 비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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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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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해의 103성, 모두 거란에 점령됨. (발해 멸망)
- 왕건, 서경에서 齋祭를 올리고 州鎭을 巡歷.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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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7년 1
(10년) |
- 왕건, 친히 후백제의 용주(경북 예천) 침공하자 신라도 지원병 보냈다.
왕건은 용주를 얻게 됨으로써 소백산맥 이남으로 진출하는 교두보를 확보하게
되었다.
그러자 견훤은 특유의 화해 제스처를 취했다. 진호의 죽음에 대한 앙갚음으로 처형했던 왕신의 시신을 정중히 돌려보낸 것이다. 그러나 예전과는 달리 북군의 공세가 심화되었다. 한편 이 무렵 남군과 북군의 전장이 형성된 곳은 내포 지역이었는데 이곳 관련된 합덕지의 합덕방죽은 견훤이 군사와 말에 물을 먹이기기 위해 조성했다는 전설인 내려온다. 이것은 그의 농업 경영에 대한 안목과 더불어 당시 남군의 주둔이 둔전 형식(현지에 주둔하는 군대의 식량을 자급자족하게 하고 군량미 비축을 통해 주변 호족들의 경제적 부담을 줄임으로 이탈을 막음)을 띄었음을 전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견훤이 지금의 원주시 문막에 성을 축조하였고 둔병들이 왕건의 군대를 맞아 싸웠다는 조선화여승람의 기록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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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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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백제 근암성을 왕건에게 빼앗김.
- 왕건이 운주(충남 홍천)로 쳐들어가 성주 긍준을 성 밑에서 격파하였다. (긍준은 이후에 고려에 투항, 936년 왕건이 신검을 칠 때 대상 벼슬을 하고 있었다.) - 운주를 공격한 지 3일 후에 왕건이 직접 근암성을 함락시켰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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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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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황룡사탑 북쪽으로 기울어짐.
- 고려는 해군 장군 영창, 능식 등을 시켜 수군을 거느리고 가서 후백제의 강주(진주) 공격하였다. 원정군은 전이산(남해), 노포평 (서산), 돌산(순천) 등 4개 향을 함락시켰다. - 왕건이 웅주(공주)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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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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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애선과 원보 재충이 대야성을 공격하여 그 성의 장군 추허조를
사로잡았다.
견훤은 당시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던 문경 일원에 병력을 집중 배치하여 북군의 남하를 저지하고 있었다. 문경은 견훤에게는 결코 빼앗길 수 없는 땅이었다. 그러나 김락이 등이 끄는 북군이 후백제의 대야성을 함락시켰다. 곧 고사갈이성의 성주인 홍달은 북군에게 속속 넘어가는 주변 정세에 편승하여 항복하였다. 홍달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파견된 후백제 관리들 마저도 일제히 투항했다. 이로서 북군은 한강과 낙동강을 잇는 거대한 수운로를 확보하여 병참선을 확보할 수 있었다. 후에 후삼국의 진운을 결정짓는 고창전투를 승리 왕건이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도 문경 지역 장악에서 비롯된 수운 교통로 확보에 힘입었다고 볼 수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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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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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해군, 후백제의 4개 항을 함락시킴.
- 왕건, 웅주를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함. - 고려군이 배산성(문경시 호계면)에 주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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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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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건, 강주를 순행.
- 명주 장군 순식이 아들 장명과 군사 600을 보내 고려에 숙위. - 견훤이 近品城과 경주에 근접한 고을부(高鬱府-영천) 공격. 신라왕이 연식을 보내어 고려에 구원 요청하였다. 왕건이 시중 공훤, 대상 손행, 정조 연주에게 군사 1만명을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게 하였다. 홍달의 투항에 분노한 견훤은 계립령로 (문경일대) 주변의 탈환과 보복을 위해 출정했고 근암성을 공격, 불 태운 후 빠른 속도로 남하해 고울부(영천)로 진격했다. 남군은 문경 쪽을 공격하였지만 기실은 성동격서 전략으로 전광석화 처럼 남하하여 신라의 도성에 바짝 다가선 것이었다. 그러나 신라는 남군의 신속한 이동을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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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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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백제 견훤, 신라의 왕경에 침입. 경애왕을 자살케 하고, 경순왕을 세웠다.
또한 친고려인사들인 국상 김웅겸(왕건을 신라에 초빙하려 했던 인물), 아찬
김률, 연식 등을 제거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때 끌려간 王弟 효겸과 재상 영경도 친고려 인사들 이었을 것이다. * 이것은 의자왕에게 했던 행주(行酒)의 보복이다. 이후로 돌이킬 수 없는 길을 걷게 된 신라는 잔인무도한 견훤에게 신라를 넘길 수 없다 하여 인자한 왕건에게 신라를 넘기게 되는 것이다. 결국 백제와 신라는 3백년 간격으로 망해 버리고 만다.(풀어 읽는 우리 신화에서 “행주” 견해)] 견훤이 의자왕의 원한을 갚고 백제 부흥을 내세웠다고는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지방민들의 호응을 얻기 위한 대의명분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다. 이것은 견훤이 무진주를 점령하고도 공공연히 칭왕하지 못한 것으로도 알 수 있는데, 견훤은 한낱 신라의 지방을 통치하는 지방관 임을 내세웠고, 그것은 그가 대외적으로 후백제왕을 자칭하고 設官分職 등 정치체제를 수립한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외교(중국과 일본)관계에서도 신라 지방관의 지위를 그대로 사용하는 것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왕건과 주고 받은 문서에서도 (당시 견훤정권은 막강한 군사력 -경애왕을 참하고 공산전투에서 승리했을 당시에도- 을 가지고 신라에 압력을 가하고 있던 시기) 견훤은 신라에 대해 자신들은 군신관계임을 뚜렷이 나타내고 있다. ※ 이것은 왕건의 경우도 마찬가지 였다고 함. 결국 견훤이 경주에 침공한 목적은 신라를 병합하기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국상 김응렴을 통해 고려와 결합하여 견훤정권에 대항하려는 경애왕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경애왕은 박씨왕으로 신라왕실 내에서 김씨 진골 왕족들의 도전을 받고 있던 상황이었다. 견훤은 박씨왕을 제거하고 김씨왕을 세운다는 대의 명분을 내세워 신라 내의 김씨 왕족으로부터 경주침공의 사실을 어느 정도 인정받고 있었다. 그리하여 왕위계승 서열상 신덕왕보다 앞에 있던 효종의 아들 김부, 경순왕을 왕위에 옹립한 것이며 때문에 경순왕은 견훤에 의해 옹립 되었으면서도 별다른 반발없이 왕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 견훤의 신라 침공은 역시 신라의 멸망이 아니라 친고려주의자 경애왕의 제거에 있었다. 당시 박씨왕이었던 경애왕은 김씨 진골귀족 들에게 또한 불만이었고 견훤의 침공당시 김씨 진골들에게 모종의 협조를 얻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해 고려 구원군이 채 당도하기도 전에 경애왕은 포석정에서 술자리를 베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장면은 견훤의 군대가 포석정에까지 이르렀을 때도 유흥은 계속되었다. <동사강목>에는 “경애왕은 호위군사가 없자 다급한 김에 손수 병풍으로 가리고 광대 1백여 명으로 막게 했다”고 한다. 그리고 황급히 이궁으로 달아나 숨었으나 곧 군사들에게 잡혀와 견훤의 강요에 의해 자결해 죽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견훤에 의해 아비규환이 되었던 신라의 궁정을 신라인들은 잊지 못하였고 결국 경애왕의 친고려정책은 고려가 한반도 통일의 승자가 되었으므로 혜안이라고 평가할 수도 있다. ※ 당시 견훤은 궁중으로 들어가 억지로 왕비를 강간했다고 하는 기록을 역사서들은 한결같이 남기고 있다. 그러나 자신의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 자결을 강요했던 견훤이 과연 그와 같은 금수와 같은 일을 할 수 있었을까? 하여간 이 일로 인해 견훤은 씻을 수 없는 오명을 입게 되는데 아마도 이것은 견훤을 악인으로 만들기 위해 조작된 사건일 가능성이 다분하다고 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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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전투. 왕건, 이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여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조제. 친히 정예한 기병 5천을 거느리고
공산 동수(대구)에서 견훤과 전투. 견훤의 군대가 왕건을 포위하여 사태가 위급해지자
신숭겸과 김락이 힘을 다해 싸우다가 희생되고 왕건은 단기로 도망하였다.
* 견훤에게 패한 왕건이 군대를 이끌고 공산 밑의 한 조그마한 봉우리를 보존하고 있는데 이곳이 태조지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 고려 태조가 진훤과 더불어 물을 사이에 두고 대진해서 화살이 수중에 쌓였다. 그래서 이곳을 살내라 부른다. 태조는 신숭겸의 시신에 머리가 없자 목공에게 명하여 머리와 얼굴을 새겨서 만들게 하고 의복을 갖추어 입힌 후, 후하게 장례를 치뤄 주었다. (증보문헌비고) * 신숭겸은 용모가 왕건과 흡사하였으므로 왕건을 대신해 죽고자 했다. 그리하여 왕건으로 하여금 깊은 숲 속에 숨도록 하고는 자신이 왕인 것처럼 어차를 타고 나가 싸우다 전사했다. (대동운부군옥. 평산신씨고려태사장절공유사) * 신숭겸의 시신은 그의 왼쪽 발에 있는 북두칠성 모양의 검은 사마귀를 보고서야 찾았다.(동사강목) * 남군이 신숭겸의 머리를 베어 차에 꽂아 가져갔다.(대동운부군옥) - 견훤, 기세를 타 신라의 大木郡(안동지방) 침공, 곡식들을 불사름. - 견훤, 고려의 벽진군(성주)을 공격하여 대목, 소목(칠곡) 두개 군의 곡식을 베어감. 고려 장군 索相(색상)이 전사. * <증보문헌비고>에는 칠곡 조에는 왕봉이라는 지명의 유래있는데 이것은 견훤에게 쫓기던 왕건이 이곳에 숨었기 때문에 지어진 이름이라 한다. - 견훤, 왕건에게 국서를 보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