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6년 1 | - 신라, 파진찬 김성을 상대등으로 삼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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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건(30세), 정기장군 금식 등을 인솔하여 군사 3000명을 거느리고 사화진(상주)을
공격, 견훤과 여러번 싸워 이김. 이에 경북 상주(당시 상주는 루트가 교차하는
요충지), 문경, 영주 등 낙동강 이북 지역이 마진의 땅이 되었다.
이 지역은 조령과 죽령 등 소백산맥을 넘어 신라의 경주로 이어지는 길목으로 낙동강 상류 지역의 중심권이었다. 이후로 나주를 확실하게 위해 궁예의 왕건 부대와 견훤 부대는 해상전을 자주 벌리게 된다. - 궁예, 신라로부터 항복해 오는 자들을 다 죽임. |
| 907년 | - 견훤, 일선(선산)군 이남 10여성을 빼앗음. 이 전투는 낙동강 중류를
끊어 놓는 전략상의 개가였다.
- 궁예, 왕건에게 명하여 정주(경기도 풍덕)에서 전함들을 수리. |
| 908년 2 | - 혜성이 동방에 나타남. |

| 909년 | - 왕건, 궁예가 나날이 포악해지자 지방 군무에 뜻을 두었는데 마침 궁예가
왕건에게 나주를 지킬 것을 명령, 관등을 높혀 한찬 해군 대장군에 임명. (이때부터
독자적 세력 형성 시작)
- 왕건, 염해현(영광)에서 오월에 보내는 후백제 使船을 나포. - 왕건, 압해현 반란군 두령 능창 사로잡아 궁예에게 보냄. 궁예가 능창의 얼굴에 침을 뱉고 그를 죽임. |
| 910년 | - 견훤이 나주에서 왕건에게 패함. 왕건은 알찬 종희, 김언 등을 부장으로
삼아 군사 2천 5백을 거느리고 진도군을 가서 치게 하여 함락시킴. 다시 진격하여
皐夷島 (고이도) 점령. 다시 나주 포구에 이르러 견훤의 함대와 격전. 풍세를
타 화공으로 격퇴. 견훤, 작은 배로 도주. 나주에 진을 둠.
- 견훤은 금성이 궁예에게 투항한 것에 분노해 보병과 기병 3천 명으로 금성을 에워싸고 공격하였으나 열흘이 지나도록 결말이 나지 않았다. (삼국사기) |
| 911년 | - 궁예는 다시 왕건을 무진주로 출정시켰다. 왕건의 선단이 뭍에 올라 나주를
경유, 광주 땅으로 진격한 것이다. 그러나 견훤의 사위 지훤이 굳건하게 방비한
성으로 잘 물리쳐 싸웠다. (세종실록 지리지)
- 신라왕이 천첩에게 빠져 정사를 돌보지 않자 대신이 천첩 죽임. - 궁예, 국호를 태봉으로, 연호를 수덕만세라 고침. - 승려 석총이 궁예를 비판하자 궁예가 쇠몽둥이로 때려죽임. |
| 912년 4 | - 신라, 효공왕 죽음. 신덕왕 즉위.
- 견훤, 궁예의 군대와 덕진포에서 싸움. - 왕건 태자 무(혜종) 출생. |
| 913년 | - 궁예, 왕건을 파진찬겸 시중으로 높혀 소환.
- 아지태 사건. - 궁예, 왕건의 시중 벼슬을 떼고 다시 수군을 통솔하게 함. |
| 914년 | - 왕건, 백선장군이 되어 수군을 거느리고 나주에 출진. 백제인들과 해상의
도적들이 감히 준동하지 못함. 이 해에 왕건은 후백제로부터 해상권 우위를
위해 100척의 선박을 더 건조하였다. 이 배들 중 큰 전함 십수 척은 사방이
각각 16보인데 갑판 위에는 망루를 만들고 병마가 달릴 수 있도록 했다.
- 궁예, 왕건을 불러 역모죄 추궁하였으나 한림랑 최응이 왕건을 구해줌. - 왕건, 군사를 거느리고 다시 나주로 감. |
| 915년 2 | - 궁예, 부인 강씨와 두 아들 죽임. |
| 916년 8 | - 후백제, 신라의 대아성 침공. 그러나 이기지 못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