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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1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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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왕이 태수 겸용을 보내 다시 왕건과 만나기를 청함.
- 왕건, 50여기를 이끌고 신라의 왕도를 방문. 이후 군사요지에 고려 장수를 주둔시켜 후백제의 침입을 대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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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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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금필이 참소를 입어 곡도로 귀양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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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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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건, 서경에 순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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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2년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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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후당에 사신을 보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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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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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건, 서경에 재변히 심하다며 직무를 공정하게 실행하라고 지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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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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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백제 장수 공직(매곡성 성주), 고려에 투항. 견훤은 공직의 두 아들과
딸 하나를 잡아서 다리 힘줄을 지져서 끊었다. (삼국유사)
* 공직의 고려 귀부는 견훤에게는 커다란 충격이었다. 매곡성은 중요 군사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또한 공직이 고려로 귀부한 것은 자신의 고을 보전이라는 현실적 이해 관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은 후에 공직이 왕건에게 “일모산군은 경계가 저의 고을과 인접해 있어 제가 귀화한 까닭으로 항시 침략을 일삼아 백성이 생업에 안정하지 못하므로 일모산성을 빼앗아.... 다스리겠습니다”하자 왕건이 허락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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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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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직의 부추김으로 왕건의 북군은 일모산성을 공격했다. 그러나 성공하지는
못했다.
- 태자 무를 보내 북쪽 변경을 순찰하게 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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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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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백제, 일길찬 상귀를 시켜 수군을 거느리고 고려의 예성강으로 쳐들어와
염주, 백주, 정주 등 세 고을의 배 100척을 불사르고 저산도 목장에 있는 말
3백필을 약탈하였다.
견훤은 일모산성 공격에 대한 보복전을 계획하여 염주(황해도 연안), 백주(황해도 배천), 정주(개성 풍덕)를 친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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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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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복수는 여기서 끝나지 않고 견훤의 해군 장수 상애 등이 대우도 (평북
용천)을 공격하게 하였다. 곧 왕건이 대광 만세 등을 보내 대우도를 구원하려
했으나 이기지 못해 (후백제는 고려군의 해군력을 궤멸시키고 서해의 재해권을
완벽하게 장악하였다) 왕건이 근심하였다.
이에 유금필이 곡도에서 글을 올리기를 “신이 비록 죄를 짓고 귀양 중에 있으나 후백제가 우리 해변 고을을 침공했다는 말을 듣고 신이 이미 장정을 뽑아 전함을 수리하여 이를 막으려고 하오니 임금께서는 근심하지 마시기를 원합니다”하였다. 왕건이 이 글을 보고 울면서 “참소를 믿고 어진 사람을 쫓은 것은 내가 밝지 못한 탓이다” 하고 사자를 보내 불러와서 위로하기를 “경은 실상 죄가 없는데도 귀양간 것을 일찍이 원망하지 않고 오직 나라를 도울 것만 생각하고 있으니 내가 매우 부끄럽고 뉘우치는 바이다. 후사에까지 상을 미치게 하여 경의 충성과 절의에 보답 하겠다” 고 함. (절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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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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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내봉경 최응 죽음 |
| 933년 3 | - 후당에서 왕건 책봉. 이때부터 천수 연호 대신 후당 연호를 사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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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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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백제 신검, 혜산성과 아불진을 공략.
- 왕건, 유금필을 보내 아불진을 구원케 함. 정남 대장군 유금필이 의주부를 지키는데, 왕건이 “후백제가 혜산성과 아불진 등을 약탈 한다고 하니, 만약 신라의 국도에까지 침공하거든 마땅히 가서 구원하라”하였다. 이에 유금필이 장사 80명을 뽑아 달려가 사탄에 이르러 후백제 신검 등을 만났는데, 후백제 군사들이 유금필의 군사가 날래고 용맹한 것을 보고 싸우지도 않고 저절로 무너졌다. 유금필이 신라에 이르니 백성들이 울면서 절했다. 7일만에 경주에서 돌아올 때 다시 신검을 자도에서 만나 싸워서 크게 이겼다. 유금필이 돌아와 왕건을 뵈니 왕건이 궁전에서 내려와 그를 맞이하여 손을 잡고 치하했다. (절요) |
| 934년 7 | - 발해 세자 대광현이 수만명을 이끌고 내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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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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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의 선박이 후당의 등주에서 무역.
- 노인성이 나타남. 남극성의 다른 이름으로 수성이라고도 한다. ‘사기’천관서에는 “남극성이 나타나면 평안무사하고 남극성이 출현하지 않으면 전쟁이 발생한다”라고 하였다. - 왕건, 운주(충남 홍주) 정벌. 견훤이 이 소식을 듣고 갑사 5천명을 이끌고 이르러 “양편의 군사가 서로 싸우니 형세가 양편이 다 보전하지 못하겠소. 무지한 병졸이 살상을 많이 당할까 염려되니 마땅히 화친을 맺어 각기 국경을 보전합시다” 하였다. 왕건이 여러 장수들과 의논하니 유금필이 “작금의 형세는 싸우지 않을 수 없사오니, 임금께서는 신 등이 적군을 부수는 것만 보시고 근심하지 마소서”하였다. 견훤이 진을 치기 전에 강한 기병 수천명으로 돌격하여 3천명의 목을 베고, 술사 종훈, 의사 훈겸과 장수 상달, 최필을 사로잡았다. 이 소식을 듣고 웅진 이북 30여성이 제풀에 항복함. (절요) * 이 운주성 싸움은 견훤 자신이 주도했던 일생일대의 마지막 전투였다. - 웅진 이북의 30여개 성이 고려에 항복하였다. |
| 935년 3 | - 후백제 신검(양검과 용검) 형제, 아우 금강을 죽이고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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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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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건, 고려의 유검필이 나주를 정벌함. 이때 유검필에 의해 장악된 나주는 곧 견훤의 탈출로로 사용이 되는데, 견훤의 고려 귀부는 견훤의 의사타진과 고려에 공작에 의해 치밀하게 전개되었을 것이다. 그래서 고려는 견훤의 탈출로로 나주를 선택하고 그곳을 정벌한 것으로 생각되어 진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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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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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훤이 나주로 탈출하여 고려에 투항하기를 청함. 견훤이 들어오자 왕건은 상부로 칭하고 남궁을 사관으로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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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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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왕 김부가 김봉휴를 보내 고려 정부로 들어오기를 청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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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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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백제 신검, 새 왕으로 즉위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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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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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라 경순왕이 백관을 거느리고 고려에 투항.
- 왕건이 천덕전에 나와 뜰에서 신라왕의 배례를 받음. - 김부를 경주의 사심관으로 삼음. - 왕건이 경순왕 김부의 백부인 잡간 억렴의 딸과 혼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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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6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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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견훤의 사위 박영규, 고려에 투항하기를 청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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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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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견훤의 요청에 따라 후백제 신검을 정벌하기 위해 출정. 우선 태자
무와 장군 희술을 시켜 보병과 기병 1만을 거느리고 천안부로 가게 함.
* 왕건이 후백제를 치기 위한 전진기지로 천안을 선택한 것은 교통의 요로 임은 물론 당시 의탁했던 풍수지리설과 관련이 없지 않다. 또한 바로 전주로 직공하지 않고 천안을 거쳐 선산으로 내려간 것을 신검 군대를 기만하기 위한 양동작전으로 보는 시각도 있고 낙동강을 병참으로 이용하기 위해서라는 설도 있다. - 왕건, 삼군을 거느리고 천안부에 가 병력을 합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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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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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백제군 일선군(선산)의 일리천 전투에서 고려군에 참패당함. 신검이
고려에 항복. 후백제 멸망.
고려 태조(60세), 삼군을 거느리고 천안부에 병력을 합세하여 일선군 (경북 선산)으로 나아가니 신검이 무력으로 이에 대항하였다. 일리천을 사이에 두고 북과 남군은 진을 쳤다. 왕건, 견훤과 함께 군사들을 사열하여 군사가 총 8만 5천명이었는데 당시 견훤은 박술희 등과 함께 마군, 즉 기병 1만 명을 지휘하였다. 이외에 왕건의 북군은 능달이 지휘하는 보병 1만 명을 좌강에, 홍유 등이 지휘하는 기병 1만 명 삼순 등이 이끄는 보병 1만 명을 우강으로 삼았으며 김순식과 긍준, 왕렴, 왕예 등이 지휘하는 기병 2만 명, 유검필 등이 이끄는 흑수, 달고, 철륵 출신의 기병 9천 5백 명, 정순 등이 이끄는 보병 1천 명, 종희가 지휘하는 보병 1천 명, 김극종이 이끄는 보병 1천 명을 중군으로 삼았다. 또 공훤이 이끄는 기병 2백명 등 10만 대군이라 일컫을 만했다. - 군사를 정비한 후 북을 치며 진군하니 갑자기 창검 형상으로 된 흰 구름이 고려 군사가 있는 상공에서 일어나 백제 쪽으로 떠갔다고 한다. - 백제 좌장군 효봉, 덕술, 애술, 명길 등 4명이 창을 버리고 견훤이 타고 섰는 말 앞에 와서 항복함. 이에 적측의 사기가 저하되어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 왕건이 효봉 등을 위로하고 신검이 있는 곳을 물으니 효봉이 말하기를 신검이 중군에 있으니 좌우로 들여치면 격파할 수 있다고 하였다. - 왕건이 대장군 공훤에게 명령하여 고추 적측의 중군을 향하여 삼군과 함께 일제히 나가면서 맹렬하게 공격하니 적병이 크게 패함. 백제 장수 흔강, 견달, 은술, 금식, 우봉을 비롯하여 3천2백명을 사로잡고 5천 7백명을 죽였다. - 백제군사들은 창끝을 돌려 저희들끼리 서로 공격하였다. - 고려 군사, 황산군까지 이르렀다가 탄령을 넘어 마성에 주둔하였다. - 결국 신검이 아우들인 청주(경남진주) 성주 양검, 광주 성주 용검과 문무 관료들을 데리고 와서 항복하였다. - 견훤, 등창이 나서 수일만에 황산 불사에서 죽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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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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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건이 송악으로 돌아와 문무백관과 백성들의 조하를 받음.
- 고려 대광 배현경 죽음. |
| 937년5
(20년) |
- 경순왕, 진평왕의 王帶를 태조에게 바침.
- 왕규와 형순을 진나라에 보내어 건국을 축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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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8년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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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탐라국 태자 말로, 개성에 와서 조공.
- 박승 등 3000호의 발해인 내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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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9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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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승 공직 죽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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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0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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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주에 대도독부 설치하고 주부군현의 이름을 고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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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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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사 충담이 죽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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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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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태사 완공. 낙성화엄법회를 열고 왕건이 친히 소문을 지음.
- 이 해에 신흥사를 중수하고 공신탑 설치. - 처음으로 역분전 정함. |
| 941년 4 | - 대광 유금필 죽음 |
| 942년 10 | - 거란, 낙타 50필을 보내옴. 그러나 왕건은 거란과 국교단절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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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43년 4
(26년) |
- 왕건, 내전에 거둥하여 대광 박술희를 불러 친히 훈요십조를 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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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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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건이 편치 못하여 정무처리를 정지.
- 재신 염상, 왕규, 박수문을 불러 내외의 기밀한 정무를 맡김. - 왕건의 병이 위독하여 학사 김악에게 명령하여 유조를 쓰게 함. - 왕건 천수를 다함. |